⟪ -과 -사이 쓰기 ⟫

   나보다 나의 이야기가 먼저 조각났다 (와) 이야기보다 내가 먼저 조각났다 (사이) 조각을 줍고 씁니다. 작업을 그만두려는 태도가 그만두지 않을 이유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슬픔과 기쁨, 정지와 지속, 부정과 긍정처럼 둘로만 나뉘어 감각되는 일상이 작업을 하며 숱하게 말했던 경계에 서기, 경계 넘기 등의 감각과 상충하여 흘러갔습니다. 몇 번의 고비를 거듭하며 임계치에 다다른 날부터 작업의 상당수를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기획자 S로부터 우연히 피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건반을 눌렀을 때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공명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건반 사이의 미세한 틈 사이로 편지를 꼽았습니다. 편지에는 소진된 신체와 회복된 상태에 관한 텍스트와 이미지가 들어있습니다. 당신은 기꺼이 자기애(와) 자기혐오(사이)의 끝없는 모순에 휩싸인 작가의 두려움을 우연과 필연 (사이)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게 비어가는 피아노는 다시 연주를 기다리는 빈 혹은 비워진 캔버스 같은 존재가 되어갑니다. 당신이 누른 건반은 오선지에 기록되고, 언젠가 저는 그 악보를 연주할 예정입니다. 당신의 우연한 선택과 보내줄 이야기는 짐처럼 쌓인 건반 위 먼지의 무게를 가늠하게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연은 마음을 가볍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가 당신에게 달라붙지 않는다면, 부디 산뜻하게 스쳐 지나갔으면 합니다. 저는 조각난 이야기를 천천히 마저 잇겠습니다.

♪ 한 통의 편지를 선택하면 두 개의 건반이 동시에 눌립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검은 건반이 흰 건반의 그림자처럼 보였습니다.

•   읽기에 따라 검은 건반은 ♭이기도 하고 #이기도 합니다. 하나가 둘이 될 수 있는 성질처럼 이미지와 텍스트를 구성하였습니다.

♪ 참여 방법

1.   이 작품의 주제와 더불어 당신의 요즘 고민이나 바람을 떠올리세요.

2.   25장의 편지(건반) 중 하나를 선택(클릭)하여 글과 그림을 감상합니다. 선택의 개수는 자유입니다.

-   세팅 규칙에 의해, 팝업으로 같은 내용이 산출될 수 있고, #(해시태그)가 있는 글의 경우 하나의 글이 더 제공됩니다.

-   #(해시태그)가 있는 글은 해당 단어를 클릭해서 다음으로 넘어가세요.

3.   감상 후, ‘악보 그리기’ 버튼을 누르면 화면 속 오선지에 해당 음표가 기보 됩니다.

-   주의: ‘악보 그리기’ 버튼을 누르면 편지가 모두 사라지며 종료됩니다.

4.   감상 후, ‘메시지’란에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쓰고 전송 버튼을 눌러주세요. 작가에게 전달됩니다.

-   작성한 답장은 차후 본 작품에 쓰일 수 있습니다. 또한, 불현듯 답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메시지를 보낼 때 되도록 이메일 주소를 기입해 주세요.

5.   이메일 주소 기입란은 원하시는 분에게 차후 본 작품에 관한 소식을 전달하는 용도입니다. 이메일 주소를 기입해 메시지를 보내 주시면 개인정보동의로 간주합니다.

6.   25개의 편지(건반)를 모두 선택하거나 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면 리셋됩니다.

악보 그리기
그만두기 (와) 버리기 (사이) 쓰기

   남아 있는 작업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타인에게 보였다가 다시 수거하고 소거했다. 작업은 완성되었다가 미완성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판매된 작업, 책이나 도록으로 출간된 작업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원한다고 지울 수 없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을 작업도 지울 수 없다. 그것들이 어디선가 부유하거나 먼지에 쌓여 있거나 버려져서 소각된 모습을 상상하며, 지워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작업의 원본을 지우기 시작했을 때는 머리를 비웠다. 의미를 부여할수록 초라했다. 이 초라함이 옛날엔 지독히 싫었다. 폐기물 처리장에 작업을 버릴 때 도와준 작가 P와 시시덕거리며 소녀가 된 듯, ‘안녕.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왜 버리냐고 물으면서도, 이어지는 질문 없이 도와주었다. 잔소리 같은 주석 없는 손길이 고마웠다. 두 손이 비었다. 초라하기보다 허전하고 시원하며 측은하다. 만질 수 있던 존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어쨌든 이유 없이 슬프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버리고 지웠다고 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에 덜 슬펐다. 지우고 알았다. 내가 원본이고, 원본이 사라지지 않기를 여전히 바란다는 걸. 비대한 에고가 나를 채우고 있어서, 타인에게 닿길 원하는 마음이 작업을 앞질러, 그 부질없는 장면이 있어야만 완성이 된다는 듯 노려보거나 울기를 반복하며 차마 등 돌리지 못하는 나를, 작업을 지우고 보았다. 연민이면 연민이고, 망가지면 망가지는 거고,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힘이 작업을 버리니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까맣게 덮인 작업은 빠지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검은 늪 같았다. 붓이 아닌 재료로 표면을 긁고 찢었다.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동을 떠올리며 동그란 선 그리기를 반복했다. 돌은 늪을 깨우는 물성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책이 완성되기 전 원고를 다 찢어 버렸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썼다. 타인을 위한 책이 아니거나, 그것이 책이 아니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1993)(윤진 옮김, 민음사) p. 19 완성에서 미완성이 된 상태에 멈췄으니, 작업이나 작업이 아니다.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니 초라하지도 않다. 용기가 났다. 긁어낸 표면은 늪에 난 생채기고 이미 여문 흉터다. 원본에 비로소 칼을 댔다. 의지에 따라 미완성으로 남는다.

백건반1
작업의 불확실성 (과) 작업의 #미완성 (사이) 쓰기

거꾸로 탄 열차가 이번에도 도착할 예정이다
어리둥절
똑바로 타면 어색해서
머리가 돈다
빙그르르
뒤로, 옆으로, 역으로
느리게, 빠르게, 순하게
울면서, 취해서, 졸면서
가장자리로, 변두리로 뱅글뱅글
중심이 없어서
께름직
보푸라기가 된 소름을 떼어가며
앞이 뒤에 붙은 머리를 의자에 기댄다
어딘지 알겠어?
모르면 연착 중, 내리지 마
여기 또 왔구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결과를 통제한다 (와) 결과를 유예하며 끝낸다 (사이) 쓰기

2014. XX. XX.
빛없는 깜깜한 어둠에서 기억의 형태를 건져 올린다. 더듬고 스치며 반복하고 곱씹는다.
2015. XX. XX.
일시적으로 어떤 답이나 완성을 유예하고 있는 이 순간을 반복하기로 한다. 반복을 연장하기로 한다. 드로잉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반복을 드로잉 한다.
2016. XX. XX.
이야기의 중심이 흔들리고 허물어지고 있는 상태가 오래되면, 미완의, 미약한, 미미한 한가운데, 한가운데를 밀어낸 땅, 땅에 묶인 몸, 중심을 쫓는 미약한 가장자리 주변이 밀어낸 땅, 땅에 묻힌 몸, 악몽
2017. XX. XX.
귀의 두께가 얇은 동물
당신의 말을 줍지 못 한 무심
답을 말해줄 수 없는 질문
부끄러움을 늘어놓는 노래
과정을 반복하는 습관
마침표 없는 도돌이표
묘사 불가능한 거울
불안과 두려움을 유예하는 미완의 풍경
2018. XX. XX.
소설가 L은 완성에 대한 강박을 완성하고, 완성한 실체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홀가분해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완성을 하고’라는 말에 감응을 받았다. 강박을 버리기 위해 완성을 우선한다는 꼿꼿함과 그 완성을 결과로 향하지 않게 분해하는 과정으로 다시 되돌리는 엄격함이, 미완성을 반복하는 나의 느슨함에 불을 지폈다. 완성이지만 미완성인 감각의 물리적인 체감, 사건은 다시 시작되었다.
2019. XX. XX.
보호와 방어 사이. 공백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선은 밖으로 옮긴다. 뒤로 걸어간다.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는 느낌으로 시선의 무게를 분산한다. 나의 몸의 무게를 느끼지만 무겁지 않은 기분으로 걷는다. 회복은 쉽지 않다.
2023. XX. XX.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난생처음 수많은 의심과 머뭇거림, 번복과 반복을 일삼은 작업과, 폐기된 작업 덕분에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경하지만 좋다. 작업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그조차 고맙다.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이 아닌, 사랑과 죽음의 연결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예술을 향한 거창한 태도가 아니다. 큐레이터 C는 자신이 죽을 때 말러의 아다지오를 틀어달라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새벽이 타오른다.
*『사라의 짐』, 봄로야, 2014 / 『누군가의 노트: 타의 세계』, 봄로야, 2017 /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 봄로야, 2019 발췌 및 최근 메모 재편집

흑건반1
녹아내리면 행복할 줄 알았다 (와) 얼어붙었던 실체를 다시 본다 (사이) 쓰기

   기획자 G, 미술가 M과 공공미술 리서치의 하나로 겨울이 더운 나라에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산등성이를 걷고 있었다. 산은 둥그렇고 부드러운 허브류의 식물과 연녹색 이끼가 카펫처럼 깔린 자잘한 바위, 유난히 곱고 붉은 흙, 바람마저 날카롭지 않고 보드라웠다. 기이한 두꺼비의 울음소리가 바위와 강가 사이에서 증폭되어 바람을 탄다. 우리는 신성한 기운에 휩싸였다. 여성형의 구체적이지 않지만 넉넉한 산의 품에 안겼다. 안겨도 된다고 스스로를 허락했음을 깨닫자, 흐르던 풍경이 잠시 정지한다. 얼었던 몸이 출렁인다. 부렸던 위선이 가장 먼저, 관계를 무너지게 한 사건과 일그러진 얼굴들이, 함부로 대한 내 몸의 흔적들이 시간차를 두고 사지에서 녹아내린다.

   “드디어 한겨울이 끝난 것 같아.” 눈물이 말과 함께 후드득 떨어졌다. 그런 나를 함께 통과한 G가 옆에 있다.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볼에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준다. 감춰왔던 M의 말이 내 귀에 감긴다. “언니, 실은 나 작년 겨우내 죽고 싶었어.” 전혀 몰랐다. 내 우울은 차갑고 무심했구나. 산은 우리를 울게 둔다. 마음 속 흙과 먼지, 쓰레기로 진창이 된 반쯤 녹은 눈더미를 계속 보고 있다. 내 곁에서 얼어붙어 버렸을 이름 모를 이가 없었는지 찾는다. 그 경험이 실재인지 망상인지 들춰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스스럼없이 안아줄 거대한 산이 나를 뚫고, 멈췄던 장면이 흐르기 시작했다.

흑건반1
자기 연민 (과) 자기방어 (사이) 쓰기

   거리에 굴러다니는 비닐봉지에서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는 그 태도가 ‘옳지 않다’고 다그치진 않는다. 다만 버림받은 존재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단계가 작업에 스며들 때를 경계한다. 태어날 때부터 민감한 성향이 있었고, 십 대 때 따돌림을 당해 버림받을까 염려하는 트라우마가 있으며, 이삼십대 땐 혼자됨이 두려워 상대로부터 먼저 도망친 나를 인정한 지도 오래다. 세상의 모든 아픔이 내 아픔인 것처럼 안을 수 있다며 노래하던 시기를 지나 양어깨에 스며든 어리석음의 무게를 체감한다. 언젠가 평론가 L 은 나에게, “내가 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게 무엇인지 빨리 판단해야지, ‘그런 마음’만 갖고 작업하기 어려워.”라는 뉘앙스의 조언을 했다.

그런 마음은 흘깃대는 곁눈질
심약한 타로 마스터
눈물만 흘리는 주책바가지
너와 나만 먹을 수 있는 사과
메아리만 남은 동굴
햇빛에서 잠든 박쥐
뭉뚱그려 묶인 보자기
자기 무덤을 파는 묘지기
선한 물귀신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서 자기 연민을 찾는 연약한 존재다. 취약한 나를 보호하느라 눈을 감고 뒤돌아 버릴 때가 많다. 그대로 무사하고 안주해도 된다. 서로의 진심과 가심이 어긋나는 장면 역시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그리는 행위는, 되뇌는 몸짓은, 내 혀로 버무리는 말은 자칫하면 서로를 더 깊은 어둠에 몰아낼 수도 있다. 버리고 싶은 나 대신 버려진 작업을 다시 붙들었으니, 가벼운 호기심이 바로 작업에 묻어나지 않게끔 무거워질 때까지 손끝에 추를 단다. 지금도 흔들리고 머뭇거린다. 그래도 도망가지는 않겠다. 비둘기를 닮은 검은 비닐봉지가 바닥에서 #분리 되어 둥실 떠올랐다. 서로를 감싸고 버티는 거리를 떠올린다.

취약성 (과) 판단 오류 (사이) 쓰기

정서적 추론: 당신은 자신의 감정이 현실에 대한 해석을 이끌도록 한다. “우울해. 따라서 내 작업은 잘되고 있는 게 아니야.”
*상담 체크리스트에서 발췌 및 정리

“왜곡된 자동적 사고의 범주” 중 나의 상태였다. 감정의 모호한 오류는 매력적이지만, 작업하는 동력과는 분리한다. 달리면서 땀과 함께 부정적 마음을 가라앉힌다.

사리보다 마시멜로

부적처럼 이 말을 내 몸에 매일 입는 좋아하는 옷처럼 입고 지낸다. 자기방어로 만들어진 쿠션을 한 입씩 먹어 치우고, 부순다.

흑건반2
뾰족해지기 위해 가늘어진다 (와) 가늘어지면 뾰족해진다 (사이) 쓰기

   그만둬야겠다고 주변에 말하면 걱정한다. 미술가 Y 선생님께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면 관 둬! 라고 일침을 듣기도 하고, 응, 그렇구나! 아니면 저도 그렇다며 길게 끄는 힘없는 온도의 말도 많이 들었다. 나만 작업을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었음을 확인하면서, 안심하고 싶었던 걸까. 동료들로부터 가늘고 길게 살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 다짐이 자기 합리화가 아닐지 의심한 적이 있다. 저 태도를 질질 흘리면서 작업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무려 3년에 걸쳐 깨달았다. 집착은 작업을 하겠다는 의지와는 달리 작업 외의 욕심과 욕구, 그로인한 결핍으로 치달았다. 작업과 기획, 그 외 아르바이트와 잡일들이 삐걱거리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아슬아슬함에 인내를 시험하는 것도 지치지만, 넓고 좁은 예술생태계에서 나와 작업이 사라져가는 자기 과잉적 기분도 참기 어려웠다. 환상을 갖는 단계는 지났다. 소멸 충동이 든 건 처음이었다.

   생태계에 다이-오프(die-off )라는 개념이 있다. 사냥 등의 인위적 원인에 의해서 격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에 의한 개체 격감을 말한다. * 캠브리지 사전 발췌 인위적이지 않음이 중요하다. 요즘은 사라지고 싶은 충동에 맞서기보다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둔다. 양손을 밀대 삼아 뭉친 몸을 둥글둥글 앞으로, 뒤로 밀어본다. 아집으로 굳은 덩어리가 얇아지면서 가늘어진다. 실체는 같으나, 엉겨 붙었던 인과들이 재정렬된다. 그럼 나를 사라지게 하는 현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할 정신이 들면, 잡념과 미세하게 거리가 생긴다. 상념을 가늘게 만든다. 가늘어지겠다가 아니고, 원래의 내 모양을 다르게 만들어보고 있다고 여긴다. 나의 경우 가늘고 뾰족한 상태를 떠올렸다. 작업이나, 목표, 꿈이 아닌 쓰는 행위를 늘린다. 지치지 않을 리 없고, 생기 없이 늘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 불안까지 같이 길어지면서 가늘어지고 날카롭게 품는 수밖에 없다. 뭉툭해질 수 없다. 불안은 밀물이 되어 작업을 덮고, 썰물이 나를 발 디딘 곳에서 멀리 데려간다. 그러다가 사라져도 그뿐, 먼저 짐짓 겁먹지 않도록 심호흡한다.

흑건반2
그만두기 (와) 버리기 (사이) 쓰기

   남아 있는 작업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타인에게 보였다가 다시 수거하고 소거했다. 작업은 완성되었다가 미완성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판매된 작업, 책이나 도록으로 출간된 작업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원한다고 지울 수 없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을 작업도 지울 수 없다. 그것들이 어디선가 부유하거나 먼지에 쌓여 있거나 버려져서 소각된 모습을 상상하며, 지워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작업의 원본을 지우기 시작했을 때는 머리를 비웠다. 의미를 부여할수록 초라했다. 이 초라함이 옛날엔 지독히 싫었다. 폐기물 처리장에 작업을 버릴 때 도와준 작가 P와 시시덕거리며 소녀가 된 듯, ‘안녕.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왜 버리냐고 물으면서도, 이어지는 질문 없이 도와주었다. 잔소리 같은 주석 없는 손길이 고마웠다. 두 손이 비었다. 초라하기보다 허전하고 시원하며 측은하다. 만질 수 있던 존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어쨌든 이유 없이 슬프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버리고 지웠다고 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에 덜 슬펐다. 지우고 알았다. 내가 원본이고, 원본이 사라지지 않기를 여전히 바란다는 걸. 비대한 에고가 나를 채우고 있어서, 타인에게 닿길 원하는 마음이 작업을 앞질러, 그 부질없는 장면이 있어야만 완성이 된다는 듯 노려보거나 울기를 반복하며 차마 등 돌리지 못하는 나를, 작업을 지우고 보았다. 연민이면 연민이고, 망가지면 망가지는 거고,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힘이 작업을 버리니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까맣게 덮인 작업은 빠지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검은 늪 같았다. 붓이 아닌 재료로 표면을 긁고 찢었다.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동을 떠올리며 동그란 선 그리기를 반복했다. 돌은 늪을 깨우는 물성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책이 완성되기 전 원고를 다 찢어 버렸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썼다. 타인을 위한 책이 아니거나, 그것이 책이 아니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1993)(윤진 옮김, 민음사) p. 19 완성에서 미완성이 된 상태에 멈췄으니, 작업이나 작업이 아니다.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니 초라하지도 않다. 용기가 났다. 긁어낸 표면은 늪에 난 생채기고 이미 여문 흉터다. 원본에 비로소 칼을 댔다. 의지에 따라 미완성으로 남는다.

백건반2
싶다 (와) 싶지 않다 (와) 싫다 (와) 싫지 않다 (사이) 쓰기

   결심하는 말들과 멀어지는 시기다. 작업을 하려면 몸이 늘어진다. 혼자만의 시간을 왁자지껄한 허공으로 흘린다. 많이 먹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폭식한다. 상황으로나 상태로나 마음이 말과 행동에 붙지 않는다. 작업과 나 사이가 거북해진다. 또 그만두고 싶다. 작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하면 그만두게 될까? 반대로 그만두기로 결심하면 부여잡을까? 가정 섞인 말에 침잠된다. 그만두고 싶은 상태와 그만 두지 않아도 될 상황을 바라는 욕망이 뒤섞인다. 또 아무것도 못 한 채 하루가 지나간다.

   나는 늘어지기 싫다. 여유로워지고 싶다. 혼자 있고 싶다. 몰입하고 싶다. 외롭기 싫다. 재미있어지고 싶다. 지루하기 싫다. 한결같음이 부러우면서도 지겹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잘 하고 싶다. 잘 하고 싶은 게 싫고 싫지 않다. 지독하고 싶고 지독하고 싶지 않다. 지독한 여자가 싫으면서도 부럽다. 하기 싫으면 안 하고 싶다. 지독히 싫은 미래의 여자가 있다. 그러나 끌린다. 끌리기 싫고 끌려가고 싶다. 끌고 싶고 끌려가고 싶지 않다. 치밀한 욕망을 단번에 놔 버리고 싶다. 내가 싫고 싫어하고 싶지 않다. 작업이 싫지 않고 싫어하고 싶지 않다. 그만두고 싶고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만두기 싫다.

   아, 그만두고 싶고 그만두기 싫다는 내가 싫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었다. 쓰기를 말한다.

   볼이 벌게진다. 양쪽으로 선명하게 벌어진 상태를 목격한다. 선택하지 않은 결심은 나를 짓누르는 덫이다. 덫에 걸려 덜컥거리는 목은 몸을 늘어뜨리고, 허공에 발길질하게 만들며, 음식의 맛을 무시한다. 이럴 땐 치고 올라오는 #슬픔 에만 집중한다. 감정의 이유를 찾지 않는다. 알아차림에 집중한다.

절망 (과) 슬픔 (과) 포기 (와) 실패 (사이) 쓰기

“으으음음, 때로 절망은, 만져지는 절망은, 절망의 기억은 때로 죽인다. 울 필요가 없다 해도, 울어야 한다. 음, 절망은…때문이다. 절망은 만져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는다. 절망의 기억은 남는다. 때로 그것은 죽인다. 절망의 기억은 정말이다. 어, 만져지기 때문이다. 음, 남는다. 어, 때로 죽인다. 쓰기. 쓰기는 만져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쓰기. 나는 못 한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한다. 정말이다. 아무도 못 한다. 그런데 쓴다. 그런데 쓴다. 아, 아아, 쓸 필요가 없다고 해도 써야 한다. 음, 어, 쓸 필요가 없다고 해도 써야 한다. 으음, 기억은 울어야 한다. 죽는다. 남는다. 쓰는 것은 남는다. 쓰기의 기억은 남는다. 어, 때로 그것은 죽인다. 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1993)(윤진 옮김, 민음사) 중 45페이지의 문구를 2021년 10월 15일부터 보름간 암송 연습을 하고, 마지막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적었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읊었다. 볼드체가 원문이다. 긴 문장도 아닌데 잘 외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입술이 벌어지며 무의식과 의식 사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노년의 뒤라스는 죽음을 앞두고 이 글을 썼다. 그녀에 따르면 문장들은 “곧 버려지는 말들”이다. 고통과 절망을 만지기 위해 되풀이되며 문장이 울고 써야 할지, 쓰고 울어야 할지 어려운 시기, 그녀의 글을 암송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수도꼭지가 별명이었던 옛날이 그리워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놓아주어야 할 과거의 흔적과 울면 안 되는 현실의 상황이 나이 듦을 더듬어 낸다. 당시 글 쓰는 A와 미술사 연구자 S와 나는 버리기와 쓰기, 포기해야 할 감각을 공유했었다. 서로를 이해할 목적은 아니다. 쓸 필요가 없다고 해도 써야 한다. 작업을 지워가면서 쓰기의 목적이 갈피를 못 잡고 무너지며 혀끝에 절망으로 남는 순간을 그저 썼다. 버려지는 작업이 소각되어 타오르는 연기를 기억한다. 실패의 문장으로 고독을 매만져야 할 때다.

흑건반3
작업에 색을 잃어버렸다 (와) 나를 잃어버렸다 (사이) 쓰기

   찢지 마세요. 버리지 마세요. 채워 주세요. 기록을 포기하지 마세요.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만든 <누군가의 노트> 첫 장에 쓴 글이다. 그때도 작업, 낙서, 볼펜 자국, 물감 자국을 노트로 만들며 정리했고, 사라짐의 감각을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한 축으로 인식하려고 애썼다. 그때의 나는 생활과 작업 모두 변두리로 밀려난 기분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작업하는 나’를 잃지 않으려 부단히 버텼다. 작업으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중심과 변두리에 대한 상념들이 끝없이 답 없는 시공간으로 작업화되었다.

   더 헤맸어야 했다. 급급하게 채우려 애쓰지 말고 끝까지 잃어버린 방향에 집중했다면, 오래 속앓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잔잔한 고통이 오래 가는 게 나은지, 거대한 파도에 한 번 휩쓸렸다가 빠져나오는 게 나은지 역시 모르겠다. 와르르 무너지고 싶다는 건방지고 오염된 욕망만 반복된다. 나에 대해서만 파고드는 것도 일종의 병이자 습관이어서, 작업은 색을 잃곤 한다. 이런 나를 알아달라는 보챔으로 그치고 만다. 나를 잃을까 조마조마하다면, 아직 잃지 않았다.

   작업을 할수록 나를 잃어버려도 된다. 너그러움을 연습 중이다. 지나친 의미를 덧대지 않는다. 억지로 채우지 말라고 다독인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들면 작업을 멈춘다. 죽음을 어설프게 부르는 꼴이다. 과장이 아니다. 차라리 찢고, 버린다. 물론 이건 작업이 아니다. 잃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흑건반3
지워버린 잘못 (과) 지운 줄 알았던 잘못 (사이) 잘못의 원본 쓰기

   20년 된 그림 위에 더 이상 잘 쓰지 않는 온갖 미술 재료와 검은 잉크, 먹물 등을 섞어 쏟아부었다. 우울감과 고통으로 소모한 청춘의 흔적들이 담긴 옛날 작업들을 굳이 꺼내 펼쳐본다. #수치스러운 잘못이 즐거웠던 기억을 자르고 튀어나온다. 의도를 소화하지 못하고 전시한 상태, 겉멋투성이, 환상으로 버무린 자기 과잉, 흉내 내기에서 멈춘 흔적,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성급한 마무리, 과장된 슬픔, 자신을 속인 거짓됨…나열하면 끝도 없을 부정적 덩어리를 목격하며, 결국 꽤 최근 작업에도 손을 댔다. 흔히 중독된 습관을 다시 찾게 될때 ‘손을 댔다’고 표현한다. 갑갑했던 두 손에 서늘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지우기에 빠진 내 손목을 붙잡은 건, 잘못을 혹독하게 반성하는 내면 아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십대 때부터 이십 대의 어린 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 켠으론 그런 나를 견디게 해준 기록들이었는데 기어코 지우고 훼손했다. 검고 텅 빈 표면에 비친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인정하고 안아주는 연습이 이렇게나 어렵다. 지운 작업에 또다른 겹의 의미를 붙여준 기획자 H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기획자 K가 내 발목을 잡았다. K의 어루만짐으로 지운 작업 위에 다시 무언가를 그렸다. 깎고 찢고 얹히거나 튕겨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그 제스처는 나를 다그치지 않는 멜랑콜리아다. 잘못을 가라앉힌 늪을 잊지말라는 다른 질감의 지시다.

말 (과) 글 (과) 실천 (사이)의 불일치 쓰기

   그날 무척 배가 고팠고, 비건 테이블에는 케이크, 빵, 떡, 과일 등의 음식을 차렸다는 말을 들었고, 당을 조절 중이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이 없었기에, 갤러리 근처 치킨집에 허겁지겁 들러 치킨과 감자튀김을 주문했고, 이도 몸에 좋을 리 없는 걸 알고 있지만, 치킨을 논비건 쪽, 감자튀김은 비건 쪽에 두면서, 치킨집의 기름통은 대부분 따로 쓰지 않는다는 상식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또 잊어버린 나를 맞닥뜨렸고, 감자튀김은 논비건 테이블로 치워졌으며, 비건 손님을 배려하여 곱고 예쁘게 나뉜 테이블을 네 식탐으로 망쳤고, 나의 허기짐이 테이블 위에 전시되어 빠르게 없어졌고, 기름으로 얼룩덜룩해진 포장 상자를 서둘러 치우고, 나는 오래돼서 눅눅한 기름 같은 회색분자가 되어, 없어도 될 심지어 그렇게 맛있지도 않았던 고기로 사려 깊게 나뉜 경계를 지워버렸다.

   2019년 겨울, 노뉴워크 그룹전 클로징 파티 때 비건과 논비건 테이블로 나누어 다과를 차렸던 날 이야기다. 멤버들이 이 순간을 인식했는지, 별 의미 없이 넘어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무심을 확인한 느물거리는 사건이다. 질이 좋지 않은 냄새에 끌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 나를 또 헐겁게 방치해서 자기 심판의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말았다. 무감각이 일상과 작업을 허겁지겁 먹어 치울 때가 있다. 작업을 대하는 태도도 다를 바 없곤 한다.
“모두를 위한 테이블을 만드느라 애쓴 친구들아, 다음에는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괜찮지 않다고 그럴 수는 없다고 꼭 말해줘. 다정하고 솔직하게.”
*노뉴워크: 2015년부터 활동 중인 페미니즘 미술 콜렉티브

흑건반4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모호하다 (와) 모호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다 (사이) 쓰기

팥죽색 자전거 도로 위 연둣빛 앵무새가 허공에 뜬 채
느리게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날갯짓 없이 회오리에 의지해
새벽노을에 미쳐
몸을 맡기고 물결을 그리며
눈을 길게 껌벅거리며 일생의 중요한 장면을
본 것처럼 숨죽여 가까이 다가갔다
미친
메로나 껍질

흑건반4
내가 만든 작업을 좋아하지 못했다 (와) 나를 좋아하지 못했다 (사이) 쓰기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나빠요.”
   생리적인 현상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처방 약을 먹었다. 눈을 뜨면 기분이 자주 가라앉았다. 여러 이유로 하루를 이끌고 가기가 버거워서 그런 거겠지, 머리를 감으며 하수구로 이유의 조각들을 흘려보냈다. 화장실 거울을 본다. 착하게 비틀린 중년 여자다. 새벽에 냉장고 문을 열어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은 음식이 내 몸을 사방에서 눌러댄다. 이 짓을 얼마나 하면, 아니야, 고개를 털었다. 나쁜 생각이 들 때 고개를 털면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다.
   -라고,

   에버노트를 켜고 어제 새벽에 한 짓을 썼다.

   약 효과가 돈다. 평평하고 심심한 기분이다. 오늘의 쓰기는 #인정하기 연습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작업도 좋아하지 않는다. 비틀렸다. 바로 이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를 싫어해도 작업해도 된다. 작업과 나와의 거리 두기는 멀어지기가 아니다. 쓰기로 메꾸다 보면 되레 벌어진다. 당신에게 들킬까 봐 불안했던 유치한 면이 이렇게 외부로 쏟아져 나왔다. 유치하다고 또 비하한다.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작업이 아니다. 안도감이 든다.
   -라고
   더 썼다.

인정 욕구로 인한 자기혐오 (와) 자기혐오로 인한 자기애 (사이) 쓰기

   작업을 지우고 버리며 느낀 감정을 상담가와 공유했다. 그녀가 내민 종이에 ‘왜곡된 자동적 사고의 범주’라고 적혀 있다. 17개의 문항 중 절반 넘게 동그라미를 치며, 왜곡된 나의 세계를 인지한다. 자기혐오와 거울같이 붙어있는 자기애를 더듬어 가며, 아직도 남아있는 몇 가지의 뒤틀림을 추려 보았다.

당신은 자신과 타인에게 일반적으로 부정적 자질을 부여한다. /당신은 부정적 사건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는 데 부적절한 양을 할당한다. /당신은 자신, 타인 사건들을 단지 기술하고 수용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좋음-나쁨이나 우수-열등의 평가적 용어로 본다.
*상담 체크리스트에서 발췌 및 정리

   남과 나의 상처가 구분 안 되던 시기가 있었다. 부정적 세계에 노출되고 흡수하고 빠져나오고 또 다른 비관이 얽힌 장소로 옮겨가며 사랑해달라, 고통을 봐 달라는 노래와, 글, 그림을 흩뿌렸었다. 비슷한 이유로 자기혐오와 자기애에 들끓던 큐레이터 S와의 사랑과 우정을 곰곰이 생각한다. 비틀리고 벌어진 서로의 살이 엉기며 기어가고, 굴러가며 생채기가 생겼다. 상처를 털어냈어야 했는데, 꽤 오래 내 고통을 그녀의 상처에 넣고 봉합했었다. 우리의 상처들은 작업이 되거나, 일기장에 적혀 기괴한 모양의 흉터를 남겼다. 어설픈 반추가 겹겹이 쌓여 후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으나, 우리는 언젠가부터 다시, 각자 움직인다. 다행이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질 일은 없다. 자기 비난으로 생긴 흉터 덕분에 너를 향한 눈길과 손짓, 말 한마디를 조심하게 된다. 사실이 아니야,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중얼거린다. 우리의 이전과 다음의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뻔한 말이지만, 나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녀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이 정도의 기분만 내게 머물러도, 지금, 여기에 잡념 없이 그녀와 내가 있다.

흑건반5
단호히 접는다 (와) 가볍게 버린다 (사이) 나의 호기심과 두려움을 쓰기

   작업을 향한 열망을 이미 몇 번 포기했었다.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끔 부지런히 나를 보호했다. 그럴수록 작업하는 시간은 자주 멈췄다. 열망이 추상화된다.
   *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적당히 내려놓고, 조금만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 녹록지 않은 삶 속에 끝까지 징글징글하게 들어가 봤다는 사람도 있다. 평소에 이러한 종류의 태도들을 다소 얕봤다. 무엇보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했다. 어리석었다. 가난한 마음과 어려운 현실은 작업을 하는 한 몇 번이고 치명타를 입힌다. 그들은 어찌 되었든 두려움에 저항하기보다 푹 껴안아 버린다. 온몸으로 사는 건 정말이지 굉장하다.
   *
   열망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도록 참거나 애쓰는 버릇은 자기방어다. 그 두려움을 못 본 척하면, 안전한 영역에서만 호기심이 발동한다. 욕구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미리 포기한 셈이다. 두려움을 머리로만 짐작했고, 그게 미래라고 착각했다.
   *
   작업을 지우고 버렸다. 아깝지 않다. 애매하게 작업하고, 애매하게 살았나 보다. 피식 웃음이 났다.

흑건반5
그만두기 (와) 버리기 (사이) 쓰기

   남아 있는 작업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타인에게 보였다가 다시 수거하고 소거했다. 작업은 완성되었다가 미완성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판매된 작업, 책이나 도록으로 출간된 작업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원한다고 지울 수 없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을 작업도 지울 수 없다. 그것들이 어디선가 부유하거나 먼지에 쌓여 있거나 버려져서 소각된 모습을 상상하며, 지워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작업의 원본을 지우기 시작했을 때는 머리를 비웠다. 의미를 부여할수록 초라했다. 이 초라함이 옛날엔 지독히 싫었다. 폐기물 처리장에 작업을 버릴 때 도와준 작가 P와 시시덕거리며 소녀가 된 듯, ‘안녕.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왜 버리냐고 물으면서도, 이어지는 질문 없이 도와주었다. 잔소리 같은 주석 없는 손길이 고마웠다. 두 손이 비었다. 초라하기보다 허전하고 시원하며 측은하다. 만질 수 있던 존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어쨌든 이유 없이 슬프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버리고 지웠다고 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에 덜 슬펐다. 지우고 알았다. 내가 원본이고, 원본이 사라지지 않기를 여전히 바란다는 걸. 비대한 에고가 나를 채우고 있어서, 타인에게 닿길 원하는 마음이 작업을 앞질러, 그 부질없는 장면이 있어야만 완성이 된다는 듯 노려보거나 울기를 반복하며 차마 등 돌리지 못하는 나를, 작업을 지우고 보았다. 연민이면 연민이고, 망가지면 망가지는 거고,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힘이 작업을 버리니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까맣게 덮인 작업은 빠지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검은 늪 같았다. 붓이 아닌 재료로 표면을 긁고 찢었다.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동을 떠올리며 동그란 선 그리기를 반복했다. 돌은 늪을 깨우는 물성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책이 완성되기 전 원고를 다 찢어 버렸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썼다. 타인을 위한 책이 아니거나, 그것이 책이 아니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1993)(윤진 옮김, 민음사) p. 19 완성에서 미완성이 된 상태에 멈췄으니, 작업이나 작업이 아니다.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니 초라하지도 않다. 용기가 났다. 긁어낸 표면은 늪에 난 생채기고 이미 여문 흉터다. 원본에 비로소 칼을 댔다. 의지에 따라 미완성으로 남는다.

백건반3
회피 (와) 사라짐 (과) 소멸 #충동 (과) 도망 (사이) 분리하여 쓰기

너는 나를 백지라고 불렀다
멀겋게 웃고 토했다
빨리 잃으려고 빨아들였다
오염은
푸르고 붉은색을 토해낸다
우글거리는 곰팡이 아래로
냅다 뛰었다
웅크려 배를 대고 기었다
발광하는 몸을 구석에 숨겼다
오랜 시간, 때때로
눈에 초점을 풀고 함몰한
늙은 땅을 봤다
퉤-
먼지가 내려앉은 얼굴에
침을 뱉었다.

뾰족해지기 위해 가늘어진다 (와) 가늘어지면 뾰족해진다 (사이) 쓰기

   그만둬야겠다고 주변에 말하면 걱정한다. 미술가 Y 선생님께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면 관 둬! 라고 일침을 듣기도 하고, 응, 그렇구나! 아니면 저도 그렇다며 길게 끄는 힘없는 온도의 말도 많이 들었다. 나만 작업을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었음을 확인하면서, 안심하고 싶었던 걸까. 동료들로부터 가늘고 길게 살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 다짐이 자기 합리화가 아닐지 의심한 적이 있다. 저 태도를 질질 흘리면서 작업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무려 3년에 걸쳐 깨달았다. 집착은 작업을 하겠다는 의지와는 달리 작업 외의 욕심과 욕구, 그로인한 결핍으로 치달았다. 작업과 기획, 그 외 아르바이트와 잡일들이 삐걱거리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아슬아슬함에 인내를 시험하는 것도 지치지만, 넓고 좁은 예술생태계에서 나와 작업이 사라져가는 자기 과잉적 기분도 참기 어려웠다. 환상을 갖는 단계는 지났다. 소멸 충동이 든 건 처음이었다.

   생태계에 다이-오프(die-off )라는 개념이 있다. 사냥 등의 인위적 원인에 의해서 격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에 의한 개체 격감을 말한다. * 캠브리지 사전 발췌 인위적이지 않음이 중요하다. 요즘은 사라지고 싶은 충동에 맞서기보다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둔다. 양손을 밀대 삼아 뭉친 몸을 둥글둥글 앞으로, 뒤로 밀어본다. 아집으로 굳은 덩어리가 얇아지면서 가늘어진다. 실체는 같으나, 엉겨 붙었던 인과들이 재정렬된다. 그럼 나를 사라지게 하는 현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할 정신이 들면, 잡념과 미세하게 거리가 생긴다. 상념을 가늘게 만든다. 가늘어지겠다가 아니고, 원래의 내 모양을 다르게 만들어보고 있다고 여긴다. 나의 경우 가늘고 뾰족한 상태를 떠올렸다. 작업이나, 목표, 꿈이 아닌 쓰는 행위를 늘린다. 지치지 않을 리 없고, 생기 없이 늘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 불안까지 같이 길어지면서 가늘어지고 날카롭게 품는 수밖에 없다. 뭉툭해질 수 없다. 불안은 밀물이 되어 작업을 덮고, 썰물이 나를 발 디딘 곳에서 멀리 데려간다. 그러다가 사라져도 그뿐, 먼저 짐짓 겁먹지 않도록 심호흡한다.

흑건반6
인정 욕구로 인한 자기혐오 (와) 자기혐오로 인한 자기애 (사이) 쓰기

   작업을 지우고 버리며 느낀 감정을 상담가와 공유했다. 그녀가 내민 종이에 ‘왜곡된 자동적 사고의 범주’라고 적혀 있다. 17개의 문항 중 절반 넘게 동그라미를 치며, 왜곡된 나의 세계를 인지한다. 자기혐오와 거울같이 붙어있는 자기애를 더듬어 가며, 아직도 남아있는 몇 가지의 뒤틀림을 추려 보았다.

당신은 자신과 타인에게 일반적으로 부정적 자질을 부여한다. /당신은 부정적 사건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는 데 부적절한 양을 할당한다. /당신은 자신, 타인 사건들을 단지 기술하고 수용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좋음-나쁨이나 우수-열등의 평가적 용어로 본다.
*상담 체크리스트에서 발췌 및 정리

   남과 나의 상처가 구분 안 되던 시기가 있었다. 부정적 세계에 노출되고 흡수하고 빠져나오고 또 다른 비관이 얽힌 장소로 옮겨가며 사랑해달라, 고통을 봐 달라는 노래와, 글, 그림을 흩뿌렸었다. 비슷한 이유로 자기혐오와 자기애에 들끓던 큐레이터 S와의 사랑과 우정을 곰곰이 생각한다. 비틀리고 벌어진 서로의 살이 엉기며 기어가고, 굴러가며 생채기가 생겼다. 상처를 털어냈어야 했는데, 꽤 오래 내 고통을 그녀의 상처에 넣고 봉합했었다. 우리의 상처들은 작업이 되거나, 일기장에 적혀 기괴한 모양의 흉터를 남겼다. 어설픈 반추가 겹겹이 쌓여 후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으나, 우리는 언젠가부터 다시, 각자 움직인다. 다행이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질 일은 없다. 자기 비난으로 생긴 흉터 덕분에 너를 향한 눈길과 손짓, 말 한마디를 조심하게 된다. 사실이 아니야,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중얼거린다. 우리의 이전과 다음의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뻔한 말이지만, 나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녀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이 정도의 기분만 내게 머물러도, 지금, 여기에 잡념 없이 그녀와 내가 있다.

흑건반6
열등감 (과) 소속감 (사이) 시간 쓰기

   무용가 L의 몸이 바닥에 붙어 허우적거린다. 중력에 무너진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어둠이 갑자기 그를 덮쳤고, 9개월간 놔주지 않았다. 전조증상이 없었다고 한다. 몸을 쓰는 사람이 움직일 수 없을 때의 촉각적인 고통을 헤아리긴 힘들다. 그가 아팠었는지 몰랐다. 우리는 평소에 안부를 묻는 사이가 아니다. 물론 안부를 묻지 않아도 때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나의 작업을 대부분 보러 왔었고, 나는 그의 작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미안함을 넘어 불균등한 관계가 아닌지 염려했다. 9개월의 시간이 각자 흘렀을 것이고, 연락이 왔다. 자신을 위한 장례식을 치른다고 했다. 순간의 절망과 싸우고 몸부림쳤을 지난한 시간은 짐작이 된다. 안부를 물으러 가기로 했다.

   도착한 장소는 다른 현대 무용가 그룹 M의 스튜디오였다. 입구에서 가장 먼 벽, 가운데 그의 영정 사진이 있고, 제사상에는 그를 통과한 예를 들어 공연 티켓 더미 같은 잡동사니가 놓여있다. 관에서 그가 나온다.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몸이 미세하게 바닥과 힘겹게 #분리된다. 몸이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가 쿵 하고 달라붙기를 반복한다. 둥글게 둘러앉은 관객의 안쪽과 그의 고통이 맞물린다. 미리 녹음한 독백이 관객 사이사이 설치된 스피커에서 시계 방향으로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갖가지 공연 목록도 들렸다. 마침내 그는 달리기 시작한다. 아직은 무언가를 더 할 때가 아니라는 듯 두 손을 포박하고 넘어질 듯 크게 휘청거린다. 그러면서도 달린다. 죽지 않고 살아낸 몸짓은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 기억나는 독백이 있다. 그는 친구와 동료의 관계를 더듬으며, 자신의 열등감과 외로움을 안부로 풀어냈다.

“친구들이 안부를 묻죠. 저처럼 무용수이고 안부를 묻지요. 제가 춤을 출 때 그들은 관객이지요. 안부를 묻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있지요. 아무것도 아닐 때도 안부를 묻지요. 그때도 친구이지요. 아니, 친구일까요? 나는 무용수일까요? 관객일까요? 그들에게 안부를 묻지요.”
* 그의 독백 중 발췌 및 재편집

   15년이 넘게 작업을 하다 보니 타인과 비교하게 된다. 열등과 열등감이 다름을 알면서도, 나 혼자만 이러나, 누구에게 말하기도 민망한 감정들. 외로움이 열등감을 끌어들이고, 열등감이 외로움을 만든다는 사실이 작업을 그만두려는 충동과 맞닿는다. 그럴 땐 혼잣말로 못난 자신과 대화한다. 지글지글한 열병에 걸렸을 때 먼저 손잡아 주는 이는 결국 나다. 그리고 안부를 건넨다. 상대에게 껄끄러운 마음이 들더라도 비밀스럽게 묻어두고, 안녕! 하고 연락한다. 그 정도면 되었다. 열등한 껍질은 우월해지고자 입었던 외투이기도 하다. 안팎으로 돋은 가시를 조금씩 거두려면, 고독한 장소로 다시, 홀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당장 눈에 안 보여도 친구이자, 동료이자, 창작자이자, 관객인 우리가 함께 숨 쉬고 있는 따뜻한 우물 아래에서, 그의 다음 안부를 기다린다.

자기 연민 (과) 자기방어 (사이) 쓰기

   거리에 굴러다니는 비닐봉지에서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는 그 태도가 ‘옳지 않다’고 다그치진 않는다. 다만 버림받은 존재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단계가 작업에 스며들 때를 경계한다. 태어날 때부터 민감한 성향이 있었고, 십 대 때 따돌림을 당해 버림받을까 염려하는 트라우마가 있으며, 이삼십대 땐 혼자됨이 두려워 상대로부터 먼저 도망친 나를 인정한 지도 오래다. 세상의 모든 아픔이 내 아픔인 것처럼 안을 수 있다며 노래하던 시기를 지나 양어깨에 스며든 어리석음의 무게를 체감한다. 언젠가 평론가 L 은 나에게, “내가 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게 무엇인지 빨리 판단해야지, ‘그런 마음’만 갖고 작업하기 어려워.”라는 뉘앙스의 조언을 했다.

그런 마음은 흘깃대는 곁눈질
심약한 타로 마스터
눈물만 흘리는 주책바가지
너와 나만 먹을 수 있는 사과
메아리만 남은 동굴
햇빛에서 잠든 박쥐
뭉뚱그려 묶인 보자기
자기 무덤을 파는 묘지기
선한 물귀신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서 자기 연민을 찾는 연약한 존재다. 취약한 나를 보호하느라 눈을 감고 뒤돌아 버릴 때가 많다. 그대로 무사하고 안주해도 된다. 서로의 진심과 가심이 어긋나는 장면 역시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그리는 행위는, 되뇌는 몸짓은, 내 혀로 버무리는 말은 자칫하면 서로를 더 깊은 어둠에 몰아낼 수도 있다. 버리고 싶은 나 대신 버려진 작업을 다시 붙들었으니, 가벼운 호기심이 바로 작업에 묻어나지 않게끔 무거워질 때까지 손끝에 추를 단다. 지금도 흔들리고 머뭇거린다. 그래도 도망가지는 않겠다. 비둘기를 닮은 검은 비닐봉지가 바닥에서 분리되어 둥실 떠올랐다. 서로를 감싸고 버티는 거리를 떠올린다.

흑건반7
말 (과) 글 (과) 실천 (사이)의 불일치 쓰기

   그날 무척 배가 고팠고, 비건 테이블에는 케이크, 빵, 떡, 과일 등의 음식을 차렸다는 말을 들었고, 당을 조절 중이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이 없었기에, 갤러리 근처 치킨집에 허겁지겁 들러 치킨과 감자튀김을 주문했고, 이도 몸에 좋을 리 없는 걸 알고 있지만, 치킨을 논비건 쪽, 감자튀김은 비건 쪽에 두면서, 치킨집의 기름통은 대부분 따로 쓰지 않는다는 상식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또 잊어버린 나를 맞닥뜨렸고, 감자튀김은 논비건 테이블로 치워졌으며, 비건 손님을 배려하여 곱고 예쁘게 나뉜 테이블을 네 식탐으로 망쳤고, 나의 허기짐이 테이블 위에 전시되어 빠르게 없어졌고, 기름으로 얼룩덜룩해진 포장 상자를 서둘러 치우고, 나는 오래돼서 눅눅한 기름 같은 회색분자가 되어, 없어도 될 심지어 그렇게 맛있지도 않았던 고기로 사려 깊게 나뉜 경계를 지워버렸다.

   2019년 겨울, 노뉴워크 그룹전 클로징 파티 때 비건과 논비건 테이블로 나누어 다과를 차렸던 날 이야기다. 멤버들이 이 순간을 인식했는지, 별 의미 없이 넘어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무심을 확인한 느물거리는 사건이다. 질이 좋지 않은 냄새에 끌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 나를 또 헐겁게 방치해서 자기 심판의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말았다. 무감각이 일상과 작업을 허겁지겁 먹어 치울 때가 있다. 작업을 대하는 태도도 다를 바 없곤 한다.
“모두를 위한 테이블을 만드느라 애쓴 친구들아, 다음에는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괜찮지 않다고 그럴 수는 없다고 꼭 말해줘. 다정하고 솔직하게.”
*노뉴워크: 2015년부터 활동 중인 페미니즘 미술 콜렉티브

흑건반7
그만두기 (와) 버리기 (사이) 쓰기

   남아 있는 작업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타인에게 보였다가 다시 수거하고 소거했다. 작업은 완성되었다가 미완성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판매된 작업, 책이나 도록으로 출간된 작업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원한다고 지울 수 없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을 작업도 지울 수 없다. 그것들이 어디선가 부유하거나 먼지에 쌓여 있거나 버려져서 소각된 모습을 상상하며, 지워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작업의 원본을 지우기 시작했을 때는 머리를 비웠다. 의미를 부여할수록 초라했다. 이 초라함이 옛날엔 지독히 싫었다. 폐기물 처리장에 작업을 버릴 때 도와준 작가 P와 시시덕거리며 소녀가 된 듯, ‘안녕.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왜 버리냐고 물으면서도, 이어지는 질문 없이 도와주었다. 잔소리 같은 주석 없는 손길이 고마웠다. 두 손이 비었다. 초라하기보다 허전하고 시원하며 측은하다. 만질 수 있던 존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어쨌든 이유 없이 슬프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버리고 지웠다고 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에 덜 슬펐다. 지우고 알았다. 내가 원본이고, 원본이 사라지지 않기를 여전히 바란다는 걸. 비대한 에고가 나를 채우고 있어서, 타인에게 닿길 원하는 마음이 작업을 앞질러, 그 부질없는 장면이 있어야만 완성이 된다는 듯 노려보거나 울기를 반복하며 차마 등 돌리지 못하는 나를, 작업을 지우고 보았다. 연민이면 연민이고, 망가지면 망가지는 거고,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힘이 작업을 버리니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까맣게 덮인 작업은 빠지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검은 늪 같았다. 붓이 아닌 재료로 표면을 긁고 찢었다.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동을 떠올리며 동그란 선 그리기를 반복했다. 돌은 늪을 깨우는 물성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책이 완성되기 전 원고를 다 찢어 버렸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썼다. 타인을 위한 책이 아니거나, 그것이 책이 아니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1993)(윤진 옮김, 민음사) p. 19 완성에서 미완성이 된 상태에 멈췄으니, 작업이나 작업이 아니다.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니 초라하지도 않다. 용기가 났다. 긁어낸 표면은 늪에 난 생채기고 이미 여문 흉터다. 원본에 비로소 칼을 댔다. 의지에 따라 미완성으로 남는다.

백건반4
지운 작업 (과) 남긴 작업 (사이) 쓰기

페이지를 #찢었다
얼굴을 도려냈다
내용을 꾹꾹 눌러 덮었다
문장이 토막 났다
앞과 뒤가 잘렸다
단언만 남았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갈아낸 현장에 이미지를 심었다
모욕적인가, 무심한가
폭력적인가
알처럼 정성스레 품지 않았다
안 보였던 진실이 명언처럼 새겨졌고,
그래서 실패했다.

작업에 색을 잃어버렸다 (와) 나를 잃어버렸다 (사이) 쓰기

   찢지 마세요. 버리지 마세요. 채워 주세요. 기록을 포기하지 마세요.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만든 <누군가의 노트> 첫 장에 쓴 글이다. 그때도 작업, 낙서, 볼펜 자국, 물감 자국을 노트로 만들며 정리했고, 사라짐의 감각을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한 축으로 인식하려고 애썼다. 그때의 나는 생활과 작업 모두 변두리로 밀려난 기분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작업하는 나’를 잃지 않으려 부단히 버텼다. 작업으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중심과 변두리에 대한 상념들이 끝없이 답 없는 시공간으로 작업화되었다.

   더 헤맸어야 했다. 급급하게 채우려 애쓰지 말고 끝까지 잃어버린 방향에 집중했다면, 오래 속앓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잔잔한 고통이 오래 가는 게 나은지, 거대한 파도에 한 번 휩쓸렸다가 빠져나오는 게 나은지 역시 모르겠다. 와르르 무너지고 싶다는 건방지고 오염된 욕망만 반복된다. 나에 대해서만 파고드는 것도 일종의 병이자 습관이어서, 작업은 색을 잃곤 한다. 이런 나를 알아달라는 보챔으로 그치고 만다. 나를 잃을까 조마조마하다면, 아직 잃지 않았다.

   작업을 할수록 나를 잃어버려도 된다. 너그러움을 연습 중이다. 지나친 의미를 덧대지 않는다. 억지로 채우지 말라고 다독인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들면 작업을 멈춘다. 죽음을 어설프게 부르는 꼴이다. 과장이 아니다. 차라리 찢고, 버린다. 물론 이건 작업이 아니다. 잃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흑건반8
절망 (과) 슬픔 (과) 포기 (와) 실패 (사이) 쓰기

“으으음음, 때로 절망은, 만져지는 절망은, 절망의 기억은 때로 죽인다. 울 필요가 없다 해도, 울어야 한다. 음, 절망은…때문이다. 절망은 만져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는다. 절망의 기억은 남는다. 때로 그것은 죽인다. 절망의 기억은 정말이다. 어, 만져지기 때문이다. 음, 남는다. 어, 때로 죽인다. 쓰기. 쓰기는 만져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쓰기. 나는 못 한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한다. 정말이다. 아무도 못 한다. 그런데 쓴다. 그런데 쓴다. 아, 아아, 쓸 필요가 없다고 해도 써야 한다. 음, 어, 쓸 필요가 없다고 해도 써야 한다. 으음, 기억은 울어야 한다. 죽는다. 남는다. 쓰는 것은 남는다. 쓰기의 기억은 남는다. 어, 때로 그것은 죽인다. 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1993)(윤진 옮김, 민음사) 중 45페이지의 문구를 2021년 10월 15일부터 보름간 암송 연습을 하고, 마지막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적었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읊었다. 볼드체가 원문이다. 긴 문장도 아닌데 잘 외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입술이 벌어지며 무의식과 의식 사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노년의 뒤라스는 죽음을 앞두고 이 글을 썼다. 그녀에 따르면 문장들은 “곧 버려지는 말들”이다. 고통과 절망을 만지기 위해 되풀이되며 문장이 울고 써야 할지, 쓰고 울어야 할지 어려운 시기, 그녀의 글을 암송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수도꼭지가 별명이었던 옛날이 그리워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놓아주어야 할 과거의 흔적과 울면 안 되는 현실의 상황이 나이 듦을 더듬어 낸다. 당시 글 쓰는 A와 미술사 연구자 S와 나는 버리기와 쓰기, 포기해야 할 감각을 공유했었다. 서로를 이해할 목적은 아니다. 쓸 필요가 없다고 해도 써야 한다. 작업을 지워가면서 쓰기의 목적이 갈피를 못 잡고 무너지며 혀끝에 절망으로 남는 순간을 그저 썼다. 버려지는 작업이 소각되어 타오르는 연기를 기억한다. 실패의 문장으로 고독을 매만져야 할 때다.

흑건반8
취약성 (과) 판단 오류 (사이) 쓰기

정서적 추론: 당신은 자신의 감정이 현실에 대한 해석을 이끌도록 한다. “우울해. 따라서 내 작업은 잘되고 있는 게 아니야.”
*상담 체크리스트에서 발췌 및 정리

“왜곡된 자동적 사고의 범주” 중 나의 상태였다. 감정의 #모호한 오류는 매력적이지만, 작업하는 동력과는 분리한다. 달리면서 땀과 함께 부정적 마음을 가라앉힌다.

사리보다 마시멜로

부적처럼 이 말을 내 몸에 매일 입는 좋아하는 옷처럼 입고 지낸다. 자기방어로 만들어진 쿠션을 한 입씩 먹어 치우고, 부순다.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모호하다 (와) 모호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다 (사이) 쓰기

팥죽색 자전거 도로 위 연둣빛 앵무새가 허공에 뜬 채
느리게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날갯짓 없이 회오리에 의지해
새벽노을에 미쳐
몸을 맡기고 물결을 그리며
눈을 길게 껌벅거리며 일생의 중요한 장면을
본 것처럼 숨죽여 가까이 다가갔다
미친
메로나 껍질

흑건반9
예민함 (과) 둔감함 (사이) 쓰기

   “다 만들면 연락할게. 네 주문이 이상해서 시간 좀 걸려. 너도 참 신기하다.”
   히죽거리며 주문서를 보던 그는 녹과 검댕이 묻은 앞치마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고맙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공방 문을 부스대며 열었다. 더운 공기와 서늘한 바람이 동시에 밀려 들어왔다. 퇴근하는 사람, 놀러 나온 사람들이 골목을 메우기 시작했고, 나는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흐려진 길을 걸으며 액세서리 가게, 옷 가게를 흘깃거렸다. 신기한 사람이 된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페인트칠은 다 했어? 가서 좀 도와줄까? 화방에 들렀다가 금방 갈게. 캔버스 천으로 창문을 좀 가리려고. 골목 한 가운데 있는 화방은 유일하게 밖의 소음을 차단한다. 젯소가 칠해져 있지 않은 천을 찾다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종이를 유심히 만져보고 있는 여자와 타투로 한쪽 팔을 가득 채운 남자를 보았다. 화방 기둥에 붙어 있는 긴 거울에 나와 그들이 같이 보인다. 가슴을 내밀고 턱을 앞으로 당겼다.

   그녀는 하얗게 칠한 자신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문지방에 두 발을 올려놓고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턱 언저리를 만지고 있다. 하얀 책상, 하얀 모니터, 하얀 플라스틱 수납장 그리고 빈 캔버스가 어제와는 다른 곳에 놓여 있었고 창문보다 한 뼘 정도 크게 자른 반투명한 흰색 실크천이 창틀에 걸려 있다. 그녀는 성큼성큼 창문으로 걸어가더니 주름 하나 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얇은 천을 부드럽게 움켜쥐고는 작은 나무집게로 집었다. 작품을 완성하듯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천장 벽지가 떨어져 아치형으로 부푼 내 방과 뜯어진 장판 모서리가 눈에 확 띈다. 페인트 많이 남았어. 필요하면 써. 피곤해서 먼저 집으로 갑니다.

   곧 계약이 완료될 집이었다. 워낙 낡았지만, 방 두 개가 널찍하니 크기가 비슷해서 쓰임새가 좋았고, 그녀는 잠시 이곳을 작업실로 쓰고 싶다고 했다. 집의 흠집을 대충 가리고 지내왔다. 찢어진 벽지 앞에 화분을 두고 커버 없이 퍼렇고 흰 형광등은 한지를 이용해서 가렸다. 방금 산 캔버스 천을 내 방 창문에 달았다. 전에 살던 사람이 발라 놓은 민트색 창틀이 천 뒤로 가려졌다. 그녀의 방을 흘깃 바라본다. 방 안에 놓인 모든 사물은 마치 건드리면 비명을 지를 듯 예민한 각도로 자리하고 있다. 얇은 천 뒤로 하얗게 칠해진 창틀이 보인다. 너답다, 나도 모르게 혀끝으로 말이 툭 튀어나왔다.
   불을 끄고 방바닥에 누웠다. 내일은 대충 재단해 실밥이 풀어진 캔버스 천을 다듬어 창문에 다시 달 것이다. ‘번쩍이지 않고 조금만 반짝이는, 투명한 안개 같은 유리구슬 팔찌’를 주문한 나를 신기해하는 공방 주인의 표정을,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내 손목 둘레를 가늠한 그의 섬세한 손길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그녀가 그녀의 방에 있을 때 종종 그러하듯, 나 역시 가끔 받지 않을 것이다.
*경험에 기반한 픽션이다.

흑건반9
슬픔이 고인다 (와) 말이 들리지 않는다 (사이) 쓰기

하나,
놀랍게도 초여름이 오다니요. 당신도 알다시피 이곳은 몇 년간 겨울이 가고 또 겨울이었어요. 얼었던 물이 녹아 얕고 조그마한 물웅덩이가 나타난 그날, 땅에 들러붙은 몸을 천천히 떼었습니다. 오랫동안 눌린 등에서 붉은 서리꽃이 피었다가 사라졌어요. 입고 있던 낡은 코트 주머니에는 수없이 쓰고 지워 읽을 수 없는 종이 조각이 가득했지요. 당신이 그 코트를 몰래 훔쳐 간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습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알몸으로 웅덩이를 핥고 만지며 뒹굴었어요. 친절한 당신은 그 조각들을 밤새 기워 답장을 띄웠어요. 봄못은 금세 날아갔어요. 아지랑이에 당신이 아른거려요.
둘,
봄못은 금세 날아갔어요. 아지랑이에 나/너가 아른거려요. 나/너는 봄못을 지나 여름 내내 소류지에 있었어요. 나/너는 밤새 내린 폭우로 우연히 생긴 습지에서 흘러넘쳤어요. 나/너가 보낸 구겨진 답장을 문질러요. 물주름을 펴 진창이 된 내 몸을 비춰요. 서로의 몸을 훔쳐요. 나/너는 오래전 가라앉았어요.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마음의 숨이 섞여 스며들어요. 갑자기 숨을 뱉어요. 나/너는 수면위로 새처럼 튀어 올라요. 두툼한 외투에 날이 선 바람이 불어요.
셋,
움푹 파인 겨울 달, 신음 섞인 검은 강, 안쪽이 텅 빈 누런 덩굴 숲, 껍질을 뚫지 못해 푸른 보라색으로 부푼 호박, 버려진 개 사이 봄못은 금세 날아갔어요. 아지랑이에 나/너가 아른거려요. 초여름이 오다니요. 이곳은 몇 년간 #겨울이 가고 또 #겨울이었어요. *<움벨트, 둠벙, 꾸르륵> 프로젝트, 2023 발췌 및 추가

녹아내리면 행복할 줄 알았다 (와) 얼어붙었던 실체를 다시 본다 (사이) 쓰기

   기획자 G, 미술가 M과 공공미술 리서치의 하나로 겨울이 더운 나라에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산등성이를 걷고 있었다. 산은 둥그렇고 부드러운 허브류의 식물과 연녹색 이끼가 카펫처럼 깔린 자잘한 바위, 유난히 곱고 붉은 흙, 바람마저 날카롭지 않고 보드라웠다. 기이한 두꺼비의 울음소리가 바위와 강가 사이에서 증폭되어 바람을 탄다. 우리는 신성한 기운에 휩싸였다. 여성형의 구체적이지 않지만 넉넉한 산의 품에 안겼다. 안겨도 된다고 스스로를 허락했음을 깨닫자, 흐르던 풍경이 잠시 정지한다. 얼었던 몸이 출렁인다. 부렸던 위선이 가장 먼저, 관계를 무너지게 한 사건과 일그러진 얼굴들이, 함부로 대한 내 몸의 흔적들이 시간차를 두고 사지에서 녹아내린다.

   “드디어 한겨울이 끝난 것 같아.” 눈물이 말과 함께 후드득 떨어졌다. 그런 나를 함께 통과한 G가 옆에 있다.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볼에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준다. 감춰왔던 M의 말이 내 귀에 감긴다. “언니, 실은 나 작년 겨우내 죽고 싶었어.” 전혀 몰랐다. 내 우울은 차갑고 무심했구나. 산은 우리를 울게 둔다. 마음 속 흙과 먼지, 쓰레기로 진창이 된 반쯤 녹은 눈더미를 계속 보고 있다. 내 곁에서 얼어붙어 버렸을 이름 모를 이가 없었는지 찾는다. 그 경험이 실재인지 망상인지 들춰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스스럼없이 안아줄 거대한 산이 나를 뚫고, 멈췄던 장면이 흐르기 시작했다.

흑건반10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결과를 통제한다 (와) 결과를 유예하며 끝낸다 (사이) 쓰기

2014. XX. XX.
빛없는 깜깜한 어둠에서 기억의 형태를 건져 올린다. 더듬고 스치며 반복하고 곱씹는다.
2015. XX. XX.
일시적으로 어떤 답이나 완성을 유예하고 있는 이 순간을 반복하기로 한다. 반복을 연장하기로 한다. 드로잉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반복을 드로잉 한다.
2016. XX. XX.
이야기의 중심이 흔들리고 허물어지고 있는 상태가 오래되면, 미완의, 미약한, 미미한 한가운데, 한가운데를 밀어낸 땅, 땅에 묶인 몸, 중심을 쫓는 미약한 가장자리 주변이 밀어낸 땅, 땅에 묻힌 몸, 악몽
2017. XX. XX.
귀의 두께가 얇은 동물
당신의 말을 줍지 못 한 무심
답을 말해줄 수 없는 질문
부끄러움을 늘어놓는 노래
과정을 반복하는 습관
마침표 없는 도돌이표
묘사 불가능한 거울
불안과 두려움을 유예하는 미완의 풍경
2018. XX. XX.
소설가 L은 완성에 대한 강박을 완성하고, 완성한 실체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홀가분해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완성을 하고’라는 말에 감응을 받았다. 강박을 버리기 위해 완성을 우선한다는 꼿꼿함과 그 완성을 결과로 향하지 않게 분해하는 과정으로 다시 되돌리는 엄격함이, 미완성을 반복하는 나의 느슨함에 불을 지폈다. 완성이지만 미완성인 감각의 물리적인 체감, 사건은 다시 시작되었다.
2019. XX. XX.
보호와 방어 사이. 공백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선은 밖으로 옮긴다. 뒤로 걸어간다.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는 느낌으로 시선의 무게를 분산한다. 나의 몸의 무게를 느끼지만 무겁지 않은 기분으로 걷는다. 회복은 쉽지 않다.
2023. XX. XX.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난생처음 수많은 의심과 머뭇거림, 번복과 반복을 일삼은 작업과, 폐기된 작업 덕분에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경하지만 좋다. 작업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그조차 고맙다.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이 아닌, 사랑과 죽음의 연결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예술을 향한 거창한 태도가 아니다. 큐레이터 C는 자신이 죽을 때 말러의 아다지오를 틀어달라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새벽이 타오른다.
*『사라의 짐』, 봄로야, 2014 / 『누군가의 노트: 타의 세계』, 봄로야, 2017 /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 봄로야, 2019 발췌 및 최근 메모 재편집

흑건반10
그만두기 (와) 버리기 (사이) 쓰기

   남아 있는 작업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타인에게 보였다가 다시 수거하고 소거했다. 작업은 완성되었다가 미완성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판매된 작업, 책이나 도록으로 출간된 작업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원한다고 지울 수 없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을 작업도 지울 수 없다. 그것들이 어디선가 부유하거나 먼지에 쌓여 있거나 버려져서 소각된 모습을 상상하며, 지워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작업의 원본을 지우기 시작했을 때는 머리를 비웠다. 의미를 부여할수록 초라했다. 이 초라함이 옛날엔 지독히 싫었다. 폐기물 처리장에 작업을 버릴 때 도와준 작가 P와 시시덕거리며 소녀가 된 듯, ‘안녕.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왜 버리냐고 물으면서도, 이어지는 질문 없이 도와주었다. 잔소리 같은 주석 없는 손길이 고마웠다. 두 손이 비었다. 초라하기보다 허전하고 시원하며 측은하다. 만질 수 있던 존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어쨌든 이유 없이 슬프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버리고 지웠다고 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에 덜 슬펐다. 지우고 알았다. 내가 원본이고, 원본이 사라지지 않기를 여전히 바란다는 걸. 비대한 에고가 나를 채우고 있어서, 타인에게 닿길 원하는 마음이 작업을 앞질러, 그 부질없는 장면이 있어야만 완성이 된다는 듯 노려보거나 울기를 반복하며 차마 등 돌리지 못하는 나를, 작업을 지우고 보았다. 연민이면 연민이고, 망가지면 망가지는 거고,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힘이 작업을 버리니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까맣게 덮인 작업은 빠지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검은 늪 같았다. 붓이 아닌 재료로 표면을 긁고 찢었다.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동을 떠올리며 동그란 선 그리기를 반복했다. 돌은 늪을 깨우는 물성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책이 완성되기 전 원고를 다 찢어 버렸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썼다. 타인을 위한 책이 아니거나, 그것이 책이 아니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1993)(윤진 옮김, 민음사) p. 19 완성에서 미완성이 된 상태에 멈췄으니, 작업이나 작업이 아니다.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니 초라하지도 않다. 용기가 났다. 긁어낸 표면은 늪에 난 생채기고 이미 여문 흉터다. 원본에 비로소 칼을 댔다. 의지에 따라 미완성으로 남는다.

백건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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