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기 (와) 버리기 (사이) 쓰기
남아 있는 작업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타인에게 보였다가 다시 수거하고 소거했다. 작업은 완성되었다가 미완성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판매된 작업, 책이나 도록으로 출간된 작업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원한다고 지울 수 없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을 작업도 지울 수 없다. 그것들이 어디선가 부유하거나 먼지에 쌓여 있거나 버려져서 소각된 모습을 상상하며, 지워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작업의 원본을 지우기 시작했을 때는 머리를 비웠다. 의미를 부여할수록 초라했다. 이 초라함이 옛날엔 지독히 싫었다. 폐기물 처리장에 작업을 버릴 때 도와준 작가 P와 시시덕거리며 소녀가 된 듯, ‘안녕.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왜 버리냐고 물으면서도, 이어지는 질문 없이 도와주었다. 잔소리 같은 주석 없는 손길이 고마웠다. 두 손이 비었다. 초라하기보다 허전하고 시원하며 측은하다. 만질 수 있던 존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어쨌든 이유 없이 슬프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버리고 지웠다고 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에 덜 슬펐다. 지우고 알았다. 내가 원본이고, 원본이 사라지지 않기를 여전히 바란다는 걸. 비대한 에고가 나를 채우고 있어서, 타인에게 닿길 원하는 마음이 작업을 앞질러, 그 부질없는 장면이 있어야만 완성이 된다는 듯 노려보거나 울기를 반복하며 차마 등 돌리지 못하는 나를, 작업을 지우고 보았다. 연민이면 연민이고, 망가지면 망가지는 거고,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힘이 작업을 버리니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까맣게 덮인 작업은 빠지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검은 늪 같았다. 붓이 아닌 재료로 표면을 긁고 찢었다.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동을 떠올리며 동그란 선 그리기를 반복했다. 돌은 늪을 깨우는 물성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책이 완성되기 전 원고를 다 찢어 버렸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썼다. 타인을 위한 책이 아니거나, 그것이 책이 아니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1993)(윤진 옮김, 민음사) p. 19 완성에서 미완성이 된 상태에 멈췄으니, 작업이나 작업이 아니다.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니 초라하지도 않다. 용기가 났다. 긁어낸 표면은 늪에 난 생채기고 이미 여문 흉터다. 원본에 비로소 칼을 댔다. 의지에 따라 미완성으로 남는다.
